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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기생문화 권번

  • 내가김태민이요~
  • 2020-12-25 18: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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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예술신문=김갑식 편집국장] 권번(券番)은 일제시대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 조선에는 관기제도말고는 공창제도가 없었으나 한일합방 후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일본식 유곽제도를 본따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를 공포했다. 그 이후 기생 활동도 허가제가 되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게 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으로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알선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 역할을 했다.

▲ 평양 기생학교 수업 모습, 1916년 촬영.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인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무렵에 만들어졌다. 관기는 1907년부터 차츰 없어져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롭게 업소를 드나들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된다.

 

이러한 관기제도의 폐지에 반대한 기부(妓夫)들은 남자가 있는 기녀 즉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합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1908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1909년 4월 1일자 ‘황성신문’에 있다. 관련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다.

 

[기생조합성립] 방한영 등 30여 인이 발기하여 한성 내 기생영업을 조합하여 풍속을 개량하기로 목적하고 규칙를 제정하여 경청(警廳)에 청원하였다더라.

(한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림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

(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한성기생조합은 나중에 광교기생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꿔 조직을 개편한다. 이 한성기생조합의 설립과 동시에 조선 기생의 ‘권번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유부기조합인 한성기생조합에 맞서 기부 없는 기녀들인 무부기(無夫妓)들의 조합도 생겨났는데 바로 다동기생조합(茶同妓生組合)이다. 그밖에도 1915년 당시 기생 조합으로는 신창기생조합, 순창기생조합 등이 더 있었다. 이중 광교, 다동, 신창조합 등은 비교적 근대적 문물이 발달해 있던 서울 남촌에 자리잡았고, 순창조합만이 북촌에 있었다.

 

광교기생조합은 경성 무교정(武橋町) 92번지, 다동기생조합은 경성 다옥정(茶屋町) 177번지, 신창기생조합은 경성 황금정(黃金町) 3정목(丁目), 순창기생조합은 경성 의주통(義州通) 2정목 201번지에 있었다.

 

서울에 이어 1910년대에는 지방에도 기생조합이 생긴다. 인천의 경우 ‘매일신보’ 1906년 3월 8일 자에 ‘용동 기가(妓家)’, 1912년 6월 28일 자에 인천 축항사에서 ‘용동기생조합소’ 소속의 기생들이 연극 공연을 한다는 기사도 있다. 

진주기생조합이 1913년 5월에 설립되었고, 평양기생조합이 1912년 12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구기생 조합은 1910년 5월 31일에 만들어졌다.

 

기생조합들은 이후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성·광교 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된다.

이후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생긴 대동권번(大同券番)과 조선권번(朝鮮券番), 또 경상·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 한남권번(漢南券番) 등이 창립되었다. 1924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권법으로는 대정, 한남, 한성, 조선의 넷을 손꼽았고, 대동권번은 폐지된 상태였다.

 

4대 권번 중 한성권번과 한남권번만 조선인이 경영하였고,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은 일본인이나 친일파가 경영했다. 한성권번은 전통적으로 기생을 관리해 온 별감 계층의 기부들이 모여 만들었기에 정통성를 주장하며 “그래도 한성권번인데” 운운하였다고 한다. 조선권번은 평양기생을 중심으로 송병준을 배경으로 조직되었으며, 원로 하규일(河圭一) 씨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국의 전통 가무를 가르치던 중심적 기관

신창권번(新彰券番)은 조중응(趙重應)의 후원에 힘입어 ‘시궁골[笠井町]’ ‘상패’라고 화류계에서 제일 천대받는 창부들에게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어 조합 허가를 내준 것이다. 당시 신창조합에 소속해 있던 창부들은 그것을 축하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찬우무골[永樂町]에 있던 조중응의 집에 가서 춤추고 노래까지 하였다고 한다.

 

기생조합이 생기고, 기생방에서 노는 절차가 무너지자 기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이나 요건은 쉬워지고 가무(歌舞)보다는 예쁜 얼굴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게 된다. 평양서 올라온 벙어리 기생을 보고 기가 막혀 어느 노기(老妓)는 앙가슴을 쳤다고 한다. 얼굴만 예쁜 기생들이 수입으로보나 인기로보나 도리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니 10년 동안 공을 쌓아 명기 되기를 꿈꾸던 노기의 가슴은 씁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 조선권번 예기양성소의 가곡반 졸업생 사진, 1938년 10월 16일. 


더구나 카페, 여급 문화가 형성되면서 기생들도 전통적인 가무보다는 유행가나 사교춤을 더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권번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가무를 가르치는 중심적 기관이었다. 대정권번의 기생 수업은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왕직 아악부에 있던 하규일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학습은 대개 아침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 중 노래와 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은 각자 자기의 특성에 맞추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배웠다.

 

노래는 우조(羽調) 6가지, 계면조(界面調) 6가지, 편 1~2가지를 배웠으며, 춤은 춘앵무(春鶯舞),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무고, 사고무, 무산향 등을 익혔다. 이러한 대정권번의 수업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기생들이 기예를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알 수 있다.

 

4대 권번 이외에도 몇 개의 권번들이 서울에 있었다. 경화권번(京和券番)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삼패(三牌)를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세운 것이다. 기생들 중에서도 격이 떨어지는 삼패로 구성된 경화권번의 기생들은 다른 권번의 기생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하는데, 1923년에 조선권번으로 흡수되었다. 경성권번(京城券番)은 1923년 10월 4일 홍병은을 중심으로 경성부 인사동 141-2번지에 설립되었다.

 

▲ 1918년 경성신문사가 펴낸 ‘조선미인보감’에 소개된 기녀들. 조선미인보감에는 권번, 기생조합에 소속된 605명의 기생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때는 소속 기생이 2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던 이 권번은 1932년 3월 12일에 서린동 70번지로 이전한 이후에는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종로권번(鐘路券番)은 1935년 9월 11일 권번 출신 기생 김옥교에 의해 경성부 청진정 164번지에 설립되었다가 이후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三和券番)으로 통합되었다.

 

삼화권번은 조선, 종로, 한성의 3대 권번 주주들이 만든 권번이다. 1942년 8월 17일에 결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하였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영업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0월 14일자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되어 한국에서 권번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기생열전

현계옥(玄桂玉)

논개와 계월향 사당도 중수한 여걸

 

계옥의 자는 섬가(蟾柯)이고 호는 예상(霓裳)으로 달성(達城) 기생인데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 아비는 악공(樂工)으로 가곡을 가르쳤는데 총명이 뛰어나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그 아비가 기적(妓籍)에 올리려 하였으나 악공의 딸이라 하여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달성으로 이사가서 노래를 팔았는데, 이 때문에 교방 기생들이 빛을 잃었다. 이렇게 해서 동기가 되어 기적에 올리는 것이 허락되고, 드디어 기계(妓界)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진주 논개(論介)의 사당과 평양 계월향(桂月香)의 사당이 퇴락되었음을 듣고,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서 중수(重修)했다가 경관에게 알려져 여러 번 잡혀가서 고문까지 당했다. 이때부터 칼 찬 사람들이 계옥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게 되어 영업에 지장이 많았다.

 

마침내 동지들과 함께 극단을 조직하여 평양으로 갔다가 압록강을 건너 상해(上海)의 한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정부 직원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탐정으로 의심하였다. 계랑(桂娘)이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 부르니 소리가 심히 구슬펐으며, 노래를 마치자 눈물이 하염없이 홀러내렸다.

 

 

▲ 가야금과 양금을 합주하는 기생들.   

그제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의심을 풀었다. 계옥은 연극을 해서 얻은 돈을 남김없이 군자금으로 희사했다. 화장도구를 모두 팔아치우고 비단 옷을 벗어 버린 뒤 나무비녀 베치마 차림으로 몸소 부엌일을 맡아서 했다.

 

계옥의 이력에 대해서는 창번(滄藩) 박해철(朴海澈)이 보내온 기록과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모두 보존해 두었다가 실제의 기록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목란화병(木蘭火兵)

 

마자강(馬訾江) 머리에는 구름이 끝없고

만주(滿珠)의 모래 위에는 북풍이 세차게 부네.

목란(木蘭)이 이미 길쌈을 그만두고

군영(軍營)으로 가서 대병(大兵)되었네.

 

馬訾江邊雲漠漠 滿珠沙上朔風驚

木蘭已謝當窓織 好向營中作火兵.

 

_ 가곡(歌曲), 이검암(李劍庵) 엮음

    

<마자강은 압록강이며, 만주(滿珠)는 만주(滿州)를 말한다. 땅에서 주옥을 생산하기 때문에 만주(滿珠))라고도 한다. 목란(木蘭)은 여자의 이름이다. 그 아비가 화병(火兵)으로 출정하게 되었는데 목란이 남장하고서 아비를 대신하여 종군했다. ‘당창직(當窓織)’은 목란사(木蘭詞)의 ‘즉즉 또, 즉즉 창가에 베짜는 소리 卿卿復卿卿 木蘭當窓織’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즉 창가에서 길쌈한다는 뜻이다.

‘계랑가桂娘歌)‘ 원본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모르지만 이겸암(李劍庵)은 이처럼 엮고 있다. 압록강을 마자강(馬訾江)으로, 만주(滿州)를 만주(滿珠)로 표현한 것을 본다면 포부가 보통이 아닌 여인임을 알 수 있다. - 이능화>

 

 

삼패(三牌)

기(妓)와 창(唱)의 종류와 등급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세분화되어 대체로 일패(一牌)·이패(二牌)·삼패(三牌)로 나뉘었다. 일패는 기생, 이패는 은근(殷勤)짜, 삼패는 탑앙모리(塔仰謨利)라 불렀다. 기생은 가무를 익혀 국가행사 및 상류사회의 각종 연회에 참석하던 관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집에서 사사로이 대접도 하였는데, 유녀(游女) 중에서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30세가 되면 기계(妓界)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패는 기생보다는 수준이 떨어지지만 대체로 기생 출신이 많았다. 은근짜라 한 것은 남몰래 은근히 매춘한다 하며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삼패는 매춘 자체가 직업으로 접객할 때에는 잡가(雜歌)만 부르고 기생처럼 가무는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에 삼패들은 당시 정계 유력자의 후원으로 신창조합(新彰組合)를 만들고 스스로 기생이라 부르게 됨에 따라 삼패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신창조합은 나중에 신창권번으로 이름을 바꾼다.

 

국악예술신문 김갑식 편집국장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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