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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남사당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가치관 전통 계승과 남사당 정신의 구현

  • 관리자 (taemin)
  • 2025-09-12 1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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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안성남사당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유랑 민중놀이 집단인 남사당패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잇고 있는 중요한 전통 예술 단체이다.

남사당패의 기원은 조선 중기 사찰이나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던 사당패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안성 청룡사를 본거지로 삼아 그 명맥을 이어왔으며, 남성 위주의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우덕이라는 여성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꼭두쇠(우두머리) 자리에 올라 조선 최고의 놀이패로 인정받는 등 독자적인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불러 큰 마당을 열고 정삼품 당상관에게 주는 옥관자를 선물했다는 사실은 안성남사당의 역사적 위상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안성남사당의 맥을 잇고, 쇠락의 위기 속에서 풍물놀이를 복원하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 김기복 선생이다. 그의 예술적 가치관은 단순한 기량의 뛰어남을 넘어 전통 예술의 보존과 계승에 대한 깊은 철학을 담고 있으며, 는 안성남사당이 오늘날까지 활발히 활동하는 데 근간이 되었다.  

 

본 보고서는 안성남사당 김기복 선생의 생애와 예술 활동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 안에 내재된 예술적 가치관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안성남사당의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특징을 먼저 이해하고,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여정과 주요 업적을 살펴본다. 이어서 그의 '신들린 쇳가락''김기복류 쇠놀음'에 담긴 미학, 전통의 '''숨 구'을 중시한 계승 철학, 그리고 여섯 마당 전수를 통한 남사당 예술의 총체성 추구 등 그의 예술적 가치관을 다각도로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예술 정신이 한국 전통 예술에 미친 영향과 현대적 의의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II. 안성남사당의 이해: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특징

남사당패의 기원과 안성남사당의 명맥

남사당패는 조선 중기 사찰이나 그 주변을 근거지로 삼아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하던 사당패에서 유래한 민중놀이 집단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서민층에서 생겨나 풍물놀이를 비롯한 다양한 기예를 선보이며 대중과 호흡했다. 다른 지역의 사당패들이 자연스럽게 소멸한 것과 달리, 안성 청룡사를 본거지로 삼았던 남사당패는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역사적 특수성을 지닌다.  

특히 안성남사당패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바우덕이라는 여성 꼭두쇠의 존재이다. 남사당패는 본래 남성 패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안성 청룡사 남사당패 손에서 자란 바우덕이는 빼어난 미모와 출중한 실력으로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꼭두쇠 자리에 올랐다. 는 안성남사당이 다른 지역의 남사당패와 달리 성별의 경계를 넘어선 실력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전통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연한 태도는 이후 김기복 선생이 쇠락의 위기에 처한 남사당을 복원하고 여섯 마당 전체를 전수하는 데 있어, 전통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안성남사당 특유의 예술적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 과거의 개방적인 특성이 현재의 보존 노력의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우덕이의 명성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불러 큰 마당을 열고 옥관자를 선물할 정도로 자자했으며, 이는 안성남사당이 조선 최고의 놀이패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성남사당의 여섯 마당과 독자성

남사당패의 공연은 풍물놀이를 기본으로 접시돌리기(버나), 재주넘기(살판), 탈놀이(덧뵈기), 줄타기(어름), 꼭두각시 놀음(덜미)의 여섯 가지 기예능을 곁들여 이루어지는 전문 연희 집단이었다. 안성남사당은 이 여섯 마당을 모두 전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놀이패가 풍물을 위주로 공연하는 것과 차별화되는 독자성을 지닌다.  

안성남사당 풍물놀이는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하며,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쓰는 특징을 보인다. 판굿의 구성은 인사굿, 돌림벅구, 겹돌림벅구, 당산멀림, 벅구놀림(양상치기), 당산놀림벅(허튼상치기), 당산돌림벅구, 오방진, 무동놀림, 벅구놀림(쌍줄백이), 사통백이, 가새벌림, 좌우치기, 네줄백이, 마당일채(쩍쩍이굿), 밀치기벅구, 상쇠놀이 등 개인놀이, 무동서기(새미받기), 채상놀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남사당패가 풍물 위주로 공연했던 반면 , 안성남사당이 여섯 마당 전체를 전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성남사당이 단순히 개별 기예의 집합체가 아니라, 통합된 서사와 미학을 지닌 '총체적 예술'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남사당 예술의 본질을 '놀이''이야기', '기예'의 복합적인 형태로 이해하고 이를 온전히 보존하려는 안성남사당의 예술적 지향점을 드러낸다. 김기복 선생이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복원했다는 것은 그의 예술적 가치관 역시 남사당 예술의 총체성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시사한다.  

 

다음 표는 안성남사당의 여섯 마당 구성과 그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1: 안성남사당 여섯 마당 구성 및 특징

  마당명칭

  주요내용 및 특징

풍물놀이(風物놀이)

꽹과리, , 장구, 북 등 악기를 연주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놀이.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사용. 인사굿, 돌림벅구, 오방진 등 다양한 판굿 구성.

버나(접시돌리기)

접시나 대접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기예. 버나놀이꾼, 어릿광대, 풍물놀이꾼이 연계하여 연행.

살판(재주기)

땅재주꾼이 어릿광대를 대동하고 음악 반주에 맞춰 물구나무를 서거나 재주를 넘는 등 신체를 활용한 기예. 위험이 따르기에 '살판'(살아남으면 다행)이라 불림.

덧뵈기(탈이)

다양한 탈을 쓰고 인물이나 동물을 흉내 내어 익살스러운 이야기와 춤을 선보이는 놀이.

어름(줄타기)

공중에 매달린 줄 위에서 재주를 넘거나 춤을 추는 기예.

덜미(꼭두각시 놀음)

인형을 조종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인형극. '대잡이''산받이'가 재담을 나누며 진행하며 주로 밤에 공연.

 

III. 김기복 선생의 생애와 남사당 예술의 길

유년 시절과 이원보 선생으로부터의 사사

김기복 선생은 1929년 안성 보개면 북가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아홉 살 되던 해 고삼면 난장에서 남사당패 명인 이원보 선생을 만나 풍물가락을 익히면서 시작되었다.

11세에 이원보에게 재간동이로 보여 풍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에는 스승과 겨루는 상쇠로 부상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 이원보 선생은 해방 후 마지막 남사당패로 불릴 정도로 당대의 명인이었으며, 김기복 선생은 그의 탁월한 상쇠 기량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기복 선생이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원보 선생을 만나 풍물을 익혔다는 것은 그의 예술적 삶이 매우 일찍부터 전통의 깊은 뿌리에 닿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스승 이원보가 '마지막 남사당패'의 명인이었다는 점과 김기복이 그의 기량을 계승했다는 점은 김기복 선생이 단순한 연희자가 아니라, 단절될 위기에 처했던 남사당 예술의 '살아있는 연결고리'이자 '계승자'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예술적 가치관이 개인의 기량 발전을 넘어선 '전통의 보존''맥 잇'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상쇠이자 꼭두쇠로서의 성장과 활동

이원보패가 해산한 뒤에도 김기복 선생은 지역에 남아 안성농악대(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로 명칭 변경)를 재건하고 전국을 누비며 안성남사당 '웃다리 가락'을 선보였다. 그는 상쇠로서 '신들린 쇳가락'선보이며 안성남사당을 다시 한번 최고의 놀이패로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과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전통성과 예술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쾌거로 이어졌다. 이 공로로 1997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고, 김기복 선생은 그 기능보유자로 이름을 올렸. 2002년 창단한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의 꼭두쇠를 역임했으며, 은퇴 후에도 안성의 풍물과 남사당 기예를 알리고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2015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원보패 해산 후에도 김기복 선생이 지역에 남아 안성농악대를 재건했다는 사실 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선 '전통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남사당 예술이 쇠락하던 시기에 그가 보여준 리더십과 헌신이 없었다면 안성남사당의 명맥이 끊겼을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통령상 수상과 무형문화재 지정은 그의 예술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전통을 재건하고 현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이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 가치관은 '위기 속에서도 전통을 재건하고 발전시키려는 강한 의지''예술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려는 사명감'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 표는 김기복 선생의 주요 업적 및 연혁을 정리한 것이다.

2: 김기복 선생의 주요 업적 및 연혁

   연도

  주요 사건/활동

  역할

1929

안성 보개면 북가현리 출생

   -

9(1937/1938)

고삼면 난장에서 이원보 선생에게 풍물가락 익힘

 제자

1940 (11)

이원보 선생에게 풍물 배움 시작

 제자

1950년대이후

대표적인 상쇠로 활약, 스승과 겨루는 상쇠로 부상

  상쇠

1982

안성남사당보존회 설립 주축

설립자/상쇠

1989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및 개인연기상 수상

상쇠/대표

1997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안성남사당풍물놀이 기능보유자 지정

기능보유자

2002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 꼭두쇠 역임

 꼭두쇠

2015

노환으로 별세 (87)

    -

20151223

흉상 제막

    -

 

IV.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가치관 심층 분석

'신들린 쇳가락'에 담긴 예술혼

김기복 선생의 상쇠 기량은 "신들린 쇳가락"으로 묘사되며 , 이는 그의 연주가 단순한 기술적 숙련도를 넘어선 영적인 몰입과 경지를 보여주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판굿에 몰입했을 때는 "강신(降神)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는 증언은 그의 예술이 초월적인 차원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신들린 쇳가락'이나 '강신의 경지'라는 표현은 김기복 선생이 단순히 기교적인 완성을 넘어선, 예술을 통한 정신적, 영적 몰입을 추구했음을 암시한다. 이는 그가 풍물놀이를 단순한 오락이나 기술적 과시가 아닌,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교감하고 몰입하는 '의례적' 또는 '영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예술적 가치관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 그의 예술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명'의 발현을 지향했으며, 이러한 초월적 경험을 통해 전통 예술의 깊은 본질을 구현하고자 했다.  

'김기복류 쇠놀음'은 경기도 무형유산 '안성남사당풍물놀이'의 예능보유자 김기복 선생의 쇠가락과 종이북상놀음으로 구성된 "경기도 안성 특유의 웃다리 쇠놀음"으로 정의된다. '웃다리 농악'은 경기·충청 일대의 농악으로, 상쇠의 기능이 우세하여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특징을 지닌다. '김기복류 쇠놀음''경기도 안성 특유의 웃다리 쇠놀음'으로

명명되고 그 특징이 명확히 제시된다는 것은 , 김기복 선생이 안성 풍물의 지역적 특색과 미학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화하여 독자적인 예술 양식으로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단순히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적 개성과 해석을 불어넣어 '새로운 유파'를 창조하려는 가치관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의 예술은 '전통의 재창조'를 통해 지역 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다.  

전통의 '''숨 구멍'을 중시한 계승 철학

김기복 선생은 전통 가락의 정체성 수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지금은 경상도, 전라도 없이 그냥 치고 나오면 모두 섞였어. 다 내력이 있는것여 모르고 그냥 막 칠것이 아니라 내고장 가락을 쳐야되. 잘들 하는디 그게 아쉬워"라고 언급하며, 각 지역 가락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그의 예술적 가치관이 '지역적 특수성과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또한 그는 현대적 변화 속에서도 전통 가치의 본질을 고수하려 했다. 물놀이가 "아무리 천천히 치라고 해도 숨 구멍이 없어. 너무 빠르고 달리기만 하지 맛이 안나"라고 비판하며, 빠른 속도와 기교 위주의 연주보다는 '숨 구멍'''이 있는 연주를 강조했다. 여기서 '숨 구멍'은 연주에 있어 여백과 호흡을, ''은 깊이와 풍류를 의미하며, 이는 전통 예술이 지닌 본질적인 미학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을 드러낸다. 기복 선생이 '내고장 가락'을 강조하고, 사물놀이의 '숨 구멍'''부재를 아쉬워했다는 점은 그가 전통 예술의 외형적 계승을 넘어선 '질적 미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예술적 가치관은 '속도''기교'와 같은 현대적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 가락이 지닌 고유의 '호흡', '여백', '깊이'를 지켜내려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한다. 이는 전통 예술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그의 믿음을 반영하며, 진정한 예술은 '느림의 미학''여유' 속에서 발현된다는 철학을 제시한다.  

여섯 마당 전수를 통한 남사당 예술의 총체성 추구

 

안성남사당이 풍물 외 버나, 땅재주, 어름, 덧뵈기, 덜미 등 여섯 마당을 모두 전수하고 있다는 점은 안성남사당의 독특한 특징이다. 김기복 선생은 마지막 꼭두쇠로서 이러한 여섯 마당의 전수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김기복 선생이 안성남사당의 마지막 꼭두쇠로서 여섯 마당 전체의 전수를 이끌었다는 것은 그가 남사당 예술을 풍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기예, 연극, 놀이 등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예술 형식'으로서 보존하고 발전시키려 했다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는 남사당 예술의 본래적 형태와 풍부한 내용을 온전히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하며, 예술의 '완전성''다양성'을 존중하는 철학을 드러낸다.  

V. 남사당 정신의 구현과 공동체적 유산

안성남사당 보존회 설립과 복원 노력

김기복 선생은 안성남사당의 명맥을 잇고 복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82년 그는 이원보패에서 상쇠 수업을 받은 제자들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를 설립했다. 이 보존회는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안성남사당의 예술적 가치를 재확인시켰다. 안성남사당보존회는 김기복 선생 덕분에 남사당패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고 설명하며, 김기복 선생이 안성 남사당패의 가락과 멋을 복원해 전수 활동을 하셨기에 지금껏 남사당패 정신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김기복 선생이 직접 보존회를 설립하고 복원 활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의 예술적 가치관이 단순히 개인의 기량 발휘에 머무르지 않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 예술을 '공동의 유산'으로 인식하고 이를 지켜내기 위한 '사회적 책임감''헌신'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보존회 설립은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넘어선 '문화유산 수호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그의 예술이 개인적인 것을 넘어선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했음을 입증한다.  

후학 양성과 전승 활동의 헌신

김기복 선생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의 꼭두쇠를 역임한 후에도 안성의 풍물과 남사당 기예를 알리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특히 그가 중학생 시절 풍물반을 지도하는 등 직접 후학을 양성하는 데 참여했음이 언급된다. 은퇴 후에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는 점 과 직접 학교 풍물반을 지도했다는 점은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가치관이 '전승의 의

'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 이어져야 할 공동의 자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전통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미래 세대에 대한 투자'라는 그의 철학을 반영하며, 예술의 생명력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데 헌신했음을 의미한다.  

예술 정신의 상징: 흉상 건립의 의미

() 김기복 선생의 흉상이 보개면 안성맞춤랜드 남사당공연장 입구에 세워졌으며 , 안성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는 제막식을 통해 전통문화예술 계승·발전에 기여한 고인의 예술정신을 기렸다. 안성남사당보존회 김기복 선생을 "바람을 타고 나는 새처럼 마당판을 휘집고 다니는 타고난 상쇄잡이"로 회고하며, 흉상 건립을 통해 "선생님의 못다한 예술혼과 안성남사당 이야기를 끊임없이 펼쳐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김기복 선생의 흉상 건립은 단순히 한 개인을 기리는 것을 넘어선다. 는 공동체가 그의 예술적 업적과 정신을 '영원한 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안성남사당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기억의 공'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흉상은 그의 예술혼이 물리적으로 현존하, 후대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전통 계승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상징물로서 기능한다. 이는 예술가가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그의 '정신''가치관'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VI. 결론: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유산과 현대적 의의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가치관은 '전통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계승하려는 의지', '지역적 특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총체적 예술로서의 남사당을 지키려는 신념', 그리고 '후학 양성을 통한 미래 전승의 책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9세의 어린 나이에 당대 명인 이원보 선생에게 사사하며 전통의 깊은 뿌리를 내렸고, 이원보패 해산 후에도 안성농악대를 재건하여 안성남사당의 명맥을 잇는 데 헌신했다. 그의 '들린 쇳가락'은 단순한 기량을 넘어선 예술혼과 강신의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김기복류 쇠놀음'을 통해 안성 지역 풍물의 독자적인 미학을 확립했다.  

특히 그는 현대 사물놀이의 빠른 속도와 기교 위주 연주에 대해 '숨 구'''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전통 가락이 지닌 고유의 호흡과 여, 깊이를 지켜내려는 확고한 신념을 보였다. 또한 안성남사당의 여섯 마당 전체를 전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남사당 예술의 총체성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1982년 안성남사당보존회를 설립하고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안성남사당의 예술적 가치를 재확인시킨 그의 노력은, 개인의 예술을 넘어선 공동체적 책임감과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은퇴 후에도 후학 양성에 힘쓴 그의 삶은 전통 전승의 의무와 미래 세대에 대한 깊은 투자를 의미한다.  

김기복 선생의 이러한 가치관은 안성남사당을 쇠락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 전통 풍물놀이 전반에 걸쳐 '진정한 전통의 가치''예술가의 사회적 역할'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김기복류 쇠놀음'은 특정 지역의 예술이 어떻게 보존되고 발전하며 독자적인 미학을 확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김기복 선생의 예술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에서 전통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급변하는 문화 환경 속에서도 전통의 '''숨 구'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대중과 소통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매력을 전달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함을 시사한다. 그의 흉상 건립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그의 예술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끊임없이 전달하, 안성남사당뿐만 아니라 모든 전통 예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전통문화예술평론가 김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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