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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하면 어떤 민요가 떠오르나요?”하고 물으면 대개 <천안삼거리(흥타령)>라고 말합니다. “다른 민요는요?”하고 물으면 “잘 모르겠는데요” 라는 답이 많습니다.
두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알려진 충남 민요가 <천안삼거리> 말고는 없다고?”라는 것과 “<천안삼거리>가 충남민요가 맞긴 해?” 라는 궁금증 말입니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몇몇 국악 이론가는 “충남은 대표적인 민요 불모지라서.”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충남은 예부터 양반 고장이라서 민요를 많이 안 불렀던 거지”라고 성급한 결론을 꺼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등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민요가 전승되고 있는데 유독 충남에만 민요가 없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충남 사람들은 외계에서 온 걸까요? 아니면 정말 양반 이력에 기한 걸까요?
충남민요를 미디어나 음악교과서로 접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폐해입니다.
민요를 전승하고 보급하는 다양한 집단과 층위가 있음에도 선택적 부각과 편집 때문에 충남 민요의 실체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교과서 중심의 편협한 기술, 선율 중심에 의한 구분법 때문에 충남 민요는 마치 민요계의 부진아처럼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충남에도 많은 민요가 존재합니다.
교과서 바깥의 현장, 미디어 프레임 바깥의 세계에서 충남은 엄청난 민요들이 산재한 민요의 보고입니다. 왜냐하면 충남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향토민요가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천혜의 명당이기 때문입니다.
전북과 인접한 서천을 비롯, 과거 행정구역상 전북에 속한 적이 있는 논산, 금산 등 충남 남부 지역은 호남 지역과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민요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금산 물페기농요>는 인근 충북, 경북의 농요권임에도 전북 지역처럼 선창 후 제창하는 가창 방식을 보입니다.
강원도 아라리 권역에 속하는 충북과 인접한 충남 북동 지역은 ‘메나리조’의 특징이 혼재된 민요들이 많습니다. 또한 천안, 아산, 당진같은 북부 지역은 경기 민요와의 직접 교섭 지역으로 민요 역시 경기민요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서산, 태안, 홍성, 보령, 서천 등 충남 서북 지역 서해안 바닷가에서는 멀리 황해도 일대에서 불리던 서도민요 계통의 음조를 가진 민요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들 지역을 포함해 예산, 청양을 비롯, 부여, 공주와 논산 일대에는 충남을 대표하는 민요들이 산재해 있어, 오늘날 ‘내포제’라는 이름으로 정립되고 있습니다.
백제소리의 맥을 이은 민요, <산유화가>
내포 지역을 대표하는 민요가 부여의 <산유화가>입니다. 이 밖에도 유흥민요인 <등타령>, <총각타령> 등은 『민요삼천리』, 『조선의 민요』, 『한국가창대계』 등에 충남의 대표 민요로 기록되어 전합니다. 특히 <산유화가>는 기능적으로는 노동요이면서도 고유의 작품명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는 특별한 민요입니다. 멀리는 백제시대에 유행했던 <산유화가>를 승계했다고 하는데, 확인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가람 이병기 선생이 채록한 <산유화가>의 가사, 그리고 1970년대 본격적으로 발굴되는 시점에서 확인된 가사와 현재의 <산유화가>의 가사가 차이가 없는데다, 해방 이전의 출판물 등에는 <산유화가>의 발생 시점이 백제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농요를 통해 이 <산유화가>가 전승되고 있음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유서 깊은 민요이자 충남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유한 민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노동 현장에 남아있는 민요로는 홍성 결성 민요, 대덕들말 두레소리, 서천 저산팔읍 베틀소리 등이 충남(대전)의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들 민요는 대개 전라도 ‘육자백이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으면서도 떠는 음이 약하고, 꺾는 음이 사실상 없는데, 이러한 특징을 몇몇 학자들은 ‘육자백이 선율’ 관점에서 정리해 육자백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결론내립니다만, 사실 ‘육자백이 선율’이라는 고정 관념을 무시하고 듣게 되면, 이 자체가 충남 고유의 음조이자 민요를 구성하는 음악적 큰 특징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유화가>가 충남의 대표 민요로 정립된데는 고 박홍남(朴弘南. 1920~2006) 명창의 공이 컸습니다. 비록 전북 출신이지만 일찍이 부여에 정착했던 박 명창에 의해 촌로들 사이에서 점점이 전하던 <산유화가>가 체계적으로 전승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박 명창은 소싯적 판소리를 공부했기에 호남의 ‘육자백이조’와 충남의 민요 음조가 다른 것을 알고는 <산유화가>가 ‘육자백이조’화 되는 것을 경계하며 지도했습니다. 남도 창법이 대유행하던 시절 충남 고유의 음조를 찾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 오늘날 충남을 대표하는 민요 즉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벼바슴(타작)하고 키질 할 때 부르는 <산유화가>인 것입니다.
<산유화가>가 부여의 노래로서 충남을 대표한다면 ‘메나리조’와 ‘육자백이조’와의 교섭 관계 속에서 태어난 공주의 노래로서 충남을 대표하는 민요가 <공주아리랑>입니다. <공주아리랑> 역시 <산유화가> 못지 않게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아 전승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특히 공주아리랑 경창대회를 통해 매년 많은 훌륭한 아리랑 명창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충남의 대표 민요, <흥타령>
하지만 교과서속에 기록되는 충남의 대표 민요는 <산유화가>나 <공주아리랑>이 아닌 유흥민요 <천안삼거리(이하 흥타령)>입니다. <흥타령>은 서울경기 지역에서 전승되는 민요들과 유사한 음조직을 보이는 까닭에, <밀양아리랑>처럼 경기민요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충남의 민요로 보지 않는 시각이 강합니다. 정말 경기민요일까요? 아니면 충남민요일까요.
토속민요의 특징 중 하나는 노랫말에 그 지역에서 전승되는 서사나 서경을 담는다는 점입니다. <흥타령> 역시 ‘천안삼거리 능수나 버들은 제 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하고 천안의 서경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흥타령>도 토속민요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습니다. <흥타령>과 관련된 다수의 증언과 기록을 종합해보면 토속민요 <흥타령>이 있었고, 후에 유흥민요 <흥타령>으로 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후술하겠지만 현재 전하는 <흥타령> 음조는 이전에 존재하던 <흥타령>과는 상당히 달라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입니다. 본조의 <흥타령>은 ‘능소 설화’ 혹은 ‘평양 감사 조성하 설화’같은 서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서사까지 확장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1910년대 발행된 초기 잡가집의 <흥타령> 노랫말에 “옥구(기생) 옥화가 정든 임 잃고 수심장탄에 잠 못 자리라”, “흥타령을 뉘가 냈노 옥구 기생에 옥화의 소작(所作)이로구나”라고 구절이 있음을 미뤄 짐작컨대 현재 불리는 <흥타령>은 군산 출신 기생 옥화가 창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옥화가 ‘경제’로 소작했는지, ‘육자백이조’로 소작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편 국립국악원 소리사전에 <흥타령>은 “경기민요풍으로 창작된 신민요로서 천안의 삼거리를 주제로 하는 경기민요이며, 곡명은 충청도 민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소리의 구성상 경기민요에 속하는 통속민요”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또한 국악원의 E-국악에는 “경기민요조(경토리) 2형”으로, 한민족백과사전에는 “충청도의 토속민요에 기원을 둔 경기민요”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다만 기원이 되는 토속민요가 어떤 곡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타령>은 엄밀히 말해 경기민요 음조인 ‘창부타령조’(진경토리) 즉 전형적인 경기선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음조직은 황해도 일대에서 전하는 ‘난봉가 조’와 흡사합니다. 다른 점은 ‘미’음을 요성하지 않는다는 것, ‘레’음을 생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남도의 ‘육자백이조’에서도 ‘미’음을 굵게 떤다는 점에서 <흥타령>은 남도나 서도 민요와는 다른 분명한 특징이 있으며, 경기 ‘창부타령조’의 노래들과도 본청이 다르다는 점에서 온전한 서울경기 음악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특징을 보이는 민요로는 <흥타령> 말고도 <베틀가>, <개성난봉가>, <한강수타령>, <경복궁타령> 등이 있는데, 이들 민요는 ‘창부타령조’와 달리 슬픈 느낌(단조)으로 부르는 특징이 있다 하여 ‘베틀가조’(혹은 반경토리)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황해도와 경기도의 음악이 교섭되는 곳 즉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 북서부 지방의 민요의 특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경기민요의 두 번째 유형(2형)이라는 것입니다.
<흥타령>은 과연 경기 북서부형 민요일까요?
몇몇 학자들은 ‘베틀가조’의 노래들을 지역적 구분법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대신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활동한 서도 소리꾼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봅니다. 이들이 서울로 진출하면서 많은 민요들을 각색해 ‘자기화’하는 작업의 성과가 나오는 시기가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기 전후 시기로, <흥타령> 역시 이 즈음 크게 변화하는데 이를 주목한 것입니다.
문헌상 <흥타령>은 19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동대가야금보』에 그 첫 기록이 보입니다. 한글육보로 기보된 이 악보집에 소개된 <흥타령>은 ‘천안산(삼)거리 수양버들은 멋에 겨워 휘늘어졌구나 아이고 데고 흥 성화가 났네 흥’이라는 기록되어 있으며, 요즘 불리는 <흥타령>과 사설면에서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능수버들’이 아닌 ‘수양버들’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능소 설화’와는 무관해 보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사설은 같고 음조는 다른 두 종류의 <흥타령>이 보입니다. 1913년 일본축음기상회가 발매한 음반에서는 이들 <흥타령>을 <경성흥타령>과 <전라도흥타령>으로 구별하였습니다. 그 즈음 발매된 잡가집군(群)의 <흥타령>에는 경성, 전라도의 구별은 없었으며, 공통적으로 허두는 ‘천안삼거리’로 시작하고 후렴은 ‘아이고 데고 흥 성화로구나 흥’으로 끝나는 것으로 노랫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곡 모두 인기를 얻으면서 분명하고 일관되게 구분할 필요성이 생겨, 결국 <전라도흥타령>은 <흥타령>으로, 서울에서 인기가 많은 <흥타령>은 <경성흥타령> 혹은 <경(京)흥타령>, <서울흥타령>으로 분리하여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노랫말도 <전라도흥타령>은 ‘아이고 데고 흥’을 그대로 부르는 반면, <경흥타령>은 밝은 곡 분위기에 맞게 긍정적 메시지를 주는 ‘에루화 짓타(좋다) 흥 경사(또는 성화)가 났구나’로 개작해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京’자가 붙은 <경흥타령>은 제목만 ‘경’이 들어갈 뿐, 서울에서 유행하던 음조인 경제 스타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서도소리조’ 중심에 ‘메나리조’ 음조가 섞인 듯한 노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서도소리꾼들의 활약으로 192, 30년대 까지 이어집니다. 다만 한가지 차이는 음반사들이 <경흥타령> 대신 <천안삼거리>를 민요 곡조로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이후 자연스럽게 <천안삼거리>가 <경흥타령> 명칭을 대체해 나갑니다. 이 즈음 <흥타령>은 ‘메나리조’는 아예 사라지고 ‘서도소리조’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1950년대 ‘솔’음이 등장하는 경제 <흥타령>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으며, 이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 ‘솔’음이 섞인 경제 <흥타령> 곡조를 ‘신조’로, 이전에 불리던 ‘서도소리조’가 중심이 되는 <흥타령>을 ‘구조’로 구별해 불렀습니다.
그러나 <구조 흥타령> 조차도 개작된 <흥타령>입니다.
개작 이전의 온전한 향토 스타일 <흥타령>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전술한 『동대가야금보』의 <흥타령> 기보는 비록 반주 선율이기는 하나 실제 민요 <흥타령>에 기초해 기록한 것임을 추정해 볼 때 오늘날 분류하는 ‘구조’ 니 ‘ 신조’니 ‘베틀가조’니 하는 <흥타령>과는 다소 거리가 먼 곡조였습니다. 이 <흥타령>은 <남도흥타령>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진행 선율선의 모양새를 보면 오히려 <서울흥타령>에 그나마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충남민요가 ‘육자백이조’나 ‘메나리조’ 혹은 ‘경제’가 섞여있는 것이 본래의 음조라는 측면을 감안하고 들여다본다면, ‘메나리조’와 ‘육자백이조’가 섞여있는 듯한 이 <흥타령>은 본디 가장 충남스런 소리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요즘 불리는 <흥타령>과는 상당히 다른 음조의 노래였던 원곡 <흥타령>이 전문가들의 수고를 거쳐 오늘날 소위 ‘베틀가조’ 경기민요 <흥타령>에 까지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런 점에서 현 시점에서 보여지는 음조직만을 가지고 지역성이나 고유성을 단정적으로 부여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즉 최소한 20세기 이전에는 충남 고유의 음조를 가진 <흥타령>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해 낼 수 있습니다.
충남의 가인(歌人), 이진홍 명창
충남 특유의 목구성을 타고난 명창으로는 1907년 예산에서 태어나 전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오산을 거쳐 서울에서 비로소 꽃을 피운 이진홍(李眞紅. 1907~1994)명창이 있습니다. 대금 명인 이생강은 한영숙 명무보다 살풀이를 더 멋지게 춘 소리꾼으로, 정가 명인 김호성은 담담한 목구성으로 김옥심, 안비취보다 더 뛰어난 내포 소리꾼으로 기억하고 있는 명창으로, 전설적인 경기명창들인 묵계월, 이은주, 김옥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소리꾼이었습니다.
이진홍의 창법은 이들 경기명창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터무니없이 맑은 목보다는 담담한 목으로 일관되게 노래하며 화려한 시김새를 쓰지 않으며, 상청 사용이 뛰어납니다. 음을 내는 방식에서 빈번하게 떨거나 굴리거나 흔드는 기교를 많이 쓰지 않습니다. 즉 담담하게 들었다 놓는 방식의 비교적 쉬워보이면서도 정갈한 창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부타령>, <노랫가락> 같은 경기무가에서는 무가조의 어정제와 서울 소리조의 중간 것 즉 반어정 창법을 주로 구사합니다. 12잡가나 잡잡가 등 서울잡가를 부를 때는 서울소리꾼들과 달리 굴리고 흔드는 시김새를 많이 생략합니다. 특히 잡가에서는 구수한 시조목을 기교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동백, 김창룡 등에 의해 번성했던 충남 판소리 중고제의 특징 중 하나가 시조를 부르는 것처럼 담백하게 부르는 판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창제는 영호남지역에서 전승되는 판소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색깔을 가진 충남고유 창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에서 충남제의 특징이 또렷했던 것처럼 경기소리 역시 충남제만의 특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남 출신 이진홍 명창을 통해 확인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진홍의 <흥타령>은 유성기음반 및 1960년대에 녹음한 민요가 남아있습니다. 특징은 소위 ‘베틀가조’로 부른다는 점과 기교적으로는 서도목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1900년대 초중반에 서도소리꾼들에게서 유행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시김을 만들 때 어정제의 느낌을 섞어 담담하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담담한 목구성을 기본으로 하되 거기에 학습한 서도목과 경기굿제의 기교를 올렸다는 의미입니다.
현대에 전하는 화려하고 기교높은 <흥타령>과 달리 담담한 톤을 베이스로 하여 편하게 부르는 스타일. 언뜻 들으면 ‘육자백이조’ 목구성같고 언뜻 들으면 시조같기도 한 목구성. 이것이 충남민요 <흥타령>의 본래 음조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흥타령>을 부르는 본 토박이 충남 사람들의 기법적 특징에 바탕한 초기 충남민요 <흥타령>의 창법과 창제를 추정해내는 한가지 주요한 단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글 김문성(국악평론가/충남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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