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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궁중문화 망궐례에 대한 기록과 활용

  • 관리자 (taemin)
  • 2021-08-23 1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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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궁중문화 망궐례에 대한 기록과 활용

                                                                                                                                        전통문화예술평론가 김태민

1.서론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지방에 보내는 국왕의 증표인 궐패(闕牌) 또는 전패(殿牌)를 봉안해 놓은 곳인데 이곳에 숙소가 딸려 있어 사신이 유숙하기도 했던 관사(館舍)이다.

객사는 관아(官衙)에서 가장 위엄이 있고 권위 있는 건물로 경내의 중심에 위치하였고 수령(首領)이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은 동쪽에 지었고 문관이나 고위직 관리들이 근무를 하였고  서쪽에는 서헌이라고 해서 무관이나 낮은 직위를 가진 관리들이 머물며 형장(刑場)을 관리 하였다.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전면에 중문(中門),외문(外門), 측면에 무랑 등이 부속되며, 정당은 와(瓦),석(石)을 깔고 좌우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동경관東京館’좌익현의 전경.

객사는 객사사(客舍史)라는 아전을 두어 관리 하였다고 한다. 객사의 명칭는 고을마다 다른데 안변군(강원도 중부에 있는 군)은 가학루(駕鶴樓), 고령은 가야관(伽倻館), 경주는 동경관(東京館),성천군(평안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군)은 동명관(東明館)등으로 불리었고 경기 안성은 백성관(白城館)이라고 불렀다.

안성(安城)은 고구려 시대에는 내혜홀(柰兮忽),신라 때 잠시 백성(白城)이라고 칭하였고 고려 때 안성현(安城縣), 고려 말에 안성군을 거쳐 1998년 4월1일 안성시 이름이 변천 해 왔다.

지금 객사는 전국 몇 곳에 남아 있는 데 조선 철종때 개축된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의 것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가까운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의 객사는 외문, 무랑(행당채)과 정당이 남아 있으나 정당은 최든에 중건하고 기와 등은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성의 객사는 고려 시대에 주심포계 양식으로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에 창건되었고 조선시대 숙종 2년(1695년)에 중건하였다가 일제 강점기때 철거령이 내려 모든 집기가 불 태워지고 정당만 남겨(1932년)에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현 명륜여자중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가 1995년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양복리( 현 안성문예회관 앞) 위치에 이전 되었다.


2.본론

객사(客舍)는 고려와 이조시대를 거쳐 각 지방 관청의 부속실로 설치했던 건축물이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지방수령이 초하루, 보름마다 망궐례를 행 하였다.

망궐례(望闕禮)는 매 월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지방의 수령이 객사(客舍)의 전패(殿牌)에 행한 의식이다. 경관직으로서 중앙 관사에 있는 자는 조하(朝賀)를 통해 임금을 뵙고 경의를 표할 기회가 있으나 지방 관아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으므로 망궐례를 했다. 

궐패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국왕을 배알하지 못하는 각 지방의 수령들이 지방 관청에서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해 임금이 임어하는 궁궐의 상징인 나무에 '전(殿)’자를 새긴 패(牌)를 만들어 각 고을 관아의 객사에 봉안하고 예를 올렸다. 또한 지방관으로 임명된 자로서 사정에 의해 조정에 하직을 하지 못하고 부임한 자도 부임지에서 망궐례를 가졌다. 

망궐례는 외직에 근무하는 관찰사, 목·부사, 절도사 등이 국왕이나 왕후의 탄일(誕日), 초하루, 보름의 삭망(朔望), 정조(正朝),동지(冬至)에 국왕과 왕후·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면서 근무지에서 궁궐을 향해 절을 하며 선비들이 회시(會試)나 정시(庭試)를 치르고자 한성에 왔다가 낙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궁궐을 향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예가 있다. 

전패(殿牌)는 조선시대 지방의 객사(客舍)에 봉안된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나무 패(牌)로 지방의 객사(客舍)에 국왕을 상징하여 봉안했다. 

지방에 출장 간 관원이나 수령이 정조(正朝), 동지(冬至), 탄일(誕日), 하례의식 등이 있을 때 아래 관원들과 함께 배례(拜禮)했다.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과 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혁파되고 수령은 파면됐다. 궐패(闕牌)는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 패(牌)로 금박(金箔)을 하였고 대궐의 정전(正殿)의 중앙에 남향(南向)으로 두는 궐패(闕牌)는 황제를 상징하며 정조(正朝),동지(冬至),성절(聖節),천추절(千秋節),황제의 칙사를 맞이할 때에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 패(牌)인 궐패(闕牌)를 정전(正殿)의 중앙에 남향(南向)으로 두고 배례(拜禮)하였다.  

1418년 11월 16일 동지(冬至)에 세종이 면유관(冕旒冠)을 쓰고 곤용포(袞龍袍)를 입고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1453년 11월 14일 동지(冬至)였으므로 근정전(勤政殿)에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큰 나무 패(牌)인 궐패(闕牌)를 설치하고 종친과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에 여러 후(侯)가 궐패(闕牌)에 절하면서 황제에게 하례(賀禮)하는 요하(遙賀)하고, 또 길복(吉服)으로써 조선국 하례(賀禮)를 행하려고 했으나 단종이 받지 아니하였다. 


1778년 10월 20일 함경도 관찰사 조준(趙㻐)이 치계(馳啓)하기를 "성진진(城津鎭)에서 국왕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각 고을 관아(官衙)의 객사(客舍)에 모셔 놓은 전패(殿牌)의 변고가 일어났습니다."하였다. 

지평 심풍지(沈豊之)가 아뢰기를 “전패를 도둑맞은 데 대해 선조(先朝)에서는 수령을 파직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지금 이 성진진의 객사(客舍)에서는 대낮에 돌입하여 전패를 때려 부수었으니 이는 참으로 막대한 변고인 것입니다. 

원범(元犯)은 이미 해당되는 율이 있으니 저절로 죄인을 조사하여 그 죄에 따라 처단하는 감단(勘斷)할 수 있지만 해당 첨사와 지방관이 평소에 삼가서 지키지 못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방행정에 지장을 초래하자 1663년(현종 4)고을을 병합하거나 강등하는 법을 폐지하였고, 71년 가족연좌법도 폐지하였으며,1796년(정조20)에는 수령을 파면하는 처벌도 완화하였다.

​비록 원범에게 광병(狂病)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것이 법기(法紀)에 있어 막대한 변고에 관계되는데 도신이 모호하게 치계의 내용을 꾸몄으니 경계하고 주의시키는 경칙(警飭)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성진 첨사 전광열(田光說), 길주 목사 강오성(姜五成)에게는 아울러 관원(官員)이 직무상의 실수나 가벼운 허물에 대한 처벌로 견책(譴責)을 당해 파직(罷職)되는 견파(譴罷)하는 형전을 시행하고 함경 감사 조준은 벼슬아치의 죄과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엄중하게 캐물어서 밝히는 종중추고(從重推考)하소서.”하니 정조가 그대로 따랐다. 1896년 8월 15일 칙령(勅令) 53호 지방의 각 부·목·군의 ‘전패’를 ‘궐패’로 고쳐 부르는 개호(改號)에 관한 안건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출처] 망궐례(望闕禮) 전패(殿牌) 궐패(闕牌)|작성자 김민수 

망궐례는 삼짓날(3월3일), 단오(5월5일)때나 유두절(6월6일), 칠석(7월7일) 
또는 중량절(9월9일 : 중구절이라고도 함)에 일반 백성에게 1년에에 1번씩 공개하여 잔치를 벌여 다고 한다. 

그 외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1474>가례편에는 객사에서 치러지는 의식의 종류와 절차를 최종적으로 명문화하였는데 다음 일곱 가지이다.

- 사신 및 외관이 정조, 동지, 탄일에 요하<(요하)전패에 하례하는 일>을 올리는 인식
- 사신 및 외관이 초하루, 보름에 요하는 의식
- 사신 및 외관이 전문(箋文: 왕이 선지를 내려 노고를 위로함)를 받는 의식
- 사신 및 외관이 선로(宣勞 : 왕이 선지를 내려 노로를 위로함)를 받는 의식
- 사신 및 외관이 내향(內香 : 왕이 내린 향)을 맞이하는 의식
- 사신 및 외교이 교서를 받는 의식
- 외관이 관찰사를 맞이하는 의식


여기서 사신이란 왕명으로 지방에 나가있는 관리를 가리켜며 외관은 지방고을 수령이다.모든 의식이 있을때는 객사 정청에 전패를 모셔 놓고 국궁사배를 하며, 따로 선로를 받거나 내향, 교서를 받을 때에는 전패 앞에 전문안이나 향안을 놓는 탁자를 놓고 이를 받는다. 

전문을 올릴 때에도 일단 전패 앞에서 전문을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나서 관리가 전문을 들고 밖으로 들고 나가면, 모든 관원이 고을 밖 5리까지 그 뒤를 따르는 의식을 치른다. 

모든 의식을 전패 앞에서 치르는 것은 마치 임금을 앞에 모시고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 만큼 전패는 임금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전패를 모신 객사 정청은 고을에서 가장 정중하게 모시는 공간 입니다.

또한 지방에 있는 수령이나 기타 관리자가 한양을 가지 못하는 수령에게 사신이 교지교부도 하였다고 한다. 

교지를 받은 자는 자기 고을 객사에서 수령칠사를 낭독 하였다.

농상성農桑盛 : 
산업 발전을 통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고

호구증 戶口增 : 
인구와 주택을 늘려 지역을 발전시키며

학교흥 學校興 : 
교육을 통하여 학문과 문화창달에 힘 쓰고

군정수 軍政修 : 
지역 안보와 사회 질서를 확립하며

부역균 賦役均 :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고

사송간 詞訟簡 : 
업무를 집행함에 공명 정대하게 하며

간활식 奸猾息 : 
공직자는 교만과 아부를 하지 않도록 한다.
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결론

객사에서는 내국에 관한 예를 올렸고 향교(鄕校)에서는 공자(孔子)의 제사를 구분하여 올렸다. 객사는 객사 본청인 정청 외에 왕의 사신이 유숙하던 방과 객사를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숙소와 부속 건물들이 딸려 있었다. 

지방에서 반란(反亂)이 나오면 먼저 객사를 봉쇄하고 심할 경우 불을 지르기도 하였는데 특히 일제강정기 및 군사정권시절에 가정의례준칙이 선포되면서 자방의 보존가치가 없는 유적과 장승들을 철거되었다.

수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지방궁중문화를  오늘날 살아 숨 쉬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고 객사의 장소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궁중문화를 재해석하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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